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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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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1-12-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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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들이 환자를 볼 때 항상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잠은 잘 주무시나요?” 잠자는 데 문제가 없고 입맛도 괜찮다면 일단 정신과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잠은 건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인생의 1/3을 잠을 자면서 보내니 만큼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잠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3 그 이상입니다. 잠자는 8시간이 불행하면 하루 24시간 전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50년 정도밖에 되질 않습니다. 그 전에는 잠이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휴식하고 있는 시간’으로만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에 따라 ‘수면에는 일정한 구조가 있으며 잠자는 것에도 질서가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즉 단순히 의식을 잃은 채 꼼짝 않고 있었다고 해서 잠을 잤다고 할 수는 없으며, 제대로 잤다고 하려면 정상 수면에 필요한 일련의 과정들을 적절히 거쳤어야 합니다. 불면증 환자는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호소하지만, 바로 옆자리에서 함께 잔 배우자는 종종 ‘코까지 골면서 잘 자더라’고 말합니다. 이렇듯이 잠이란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그저 눈 감은 채 쉬고 있는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잠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체의 일주기(circardian rhythm)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몸(대뇌) 안에는 생체시계(biological clock)라는 것이 있는데, 인체는 이 생체시계의 진동에 맞춰 일정 주기에 따라 변동을 합니다. 간단한 예로 사람은 해가 지면 저절로 잠이 오고, 아침이 되면 눈이 떠집니다. 물론 낮에 쌓인 피로감이라든지 외부자극이 줄어든 것(어두워짐) 등이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외적 자극이 없는 상황(며칠간 캄캄한 방에 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도록 조작했을 때)에서도 인체는 졸림과 깨어남을 주기적으로 반복합니다. 이는 24시간의 주기를 갖는 외부 환경(낮과 밤의 변화, 출퇴근 시간, 식사시간)보다 조금 긴 25시간의 주기를 갖습니다. 이렇게 1시간이 더 길기 때문에 방학이나 휴가철이 되면 자연적으로 점점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어지곤 하는 것입니다.

25시간의 생체시계 주기에 따라 변동하는 인체 기능 중 대표적인 것으로 호르몬의 분비량 변화와 체온의 변동 그리고 수면-각성 주기 등이 있습니다. 성장호르몬과 프로락틴은 잠자는 동안 많이 분비되며, 성호르몬은 수면주기와는 무관하게 자체적인 변동 곡선을 보입니다. 오후에 최고로 높아진 체온은 잠잘 시간 즈음에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여 기상 시간 무렵에 최저점을 지납니다(이 때문에 새벽에 깼을 때 몸이 춥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수면 역시 일정한 리듬과 구조를 갖습니다. 수면의 주기는 12시간 정도로 하루 두 번 수면 곡선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낮에 한차례 정도 졸음이 오는 것이며, 이때 잠깐이라도 낮잠을 자고나면 충분히 개운한 느낌이 듭니다. 야간 수면은 해질녘에 시작이 되는데, 어두침침한 빛이 대뇌의 송과체를 자극하여 멜라토닌(melatonin)이라는 호르몬을 분비시킵니다. 이 멜라토닌이 수면을 유도하는 데 일조(一助)를 하며, 최근 불면증 치료제로서 멜라토닌에 관심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25시간의 주기로 변동하는 인체주기에 맞춰 생활하지 못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교대근무와 비행시차입니다. 즉 생체시계가 “자야할 시간”이라고 신호를 보내도 사정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다면 생체리듬의 조화가 깨져 불면증이나 만성피로증후군 같은 질병이 생기게 됩니다.

생체시계의 리듬에 따라 자야할 시간에 잠자리에 누웠다고 해서 무조건 수면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잠자는 동안의 수면 구조 역시 중요합니다. 잠자는 8시간 동안에도 인체는 1시간 30분마다 반복되는 또 다른 주기를 보입니다. 약 70분 동안의 Non-REM 수면과 20분 정도의 REM 수면이 번갈아 나타납니다. Non-REM 수면은 다시 1~4단계로 구분되어, 1~2단계를 얕은 수면, 3~4단계를 깊은 수면으로 나눕니다. 1단계부터 4단계로 진행함에 따라 점차 대뇌 활동이 적어지면서 뇌파도 느려지고, 심장박동과 혈압, 호흡도 감소하면서 신체 상태는 전체적으로 안정화됩니다. 즉 충분히 긴장을 푼 채로 휴식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REM 수면에 접어들면 상황은 돌변합니다. 먼저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대뇌의 활동이 급격히 많아져 뇌파가 빨라집니다. 이것은 낮 동안에 경험한 여러 기억들을 저장하고 각종 정보들을 처리하는 과정입니다. 이러는 동안 꿈을 꾸게 되는데, 꿈이란 감정적으로 부담되었던 일들을 마음(머리)속으로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또한 맥박과 호흡, 혈압도 들쑥날쑥하면서 높아지고 체온 역시 변온상태가 됩니다. 즉 REM 수면이란 낮 동안에 지쳐있는 인체의 상태를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시 조화롭게 재조정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러한 Non-REM 수면과 REM 수면이 평균 4~5번 반복되면서 하루 8시간 정도의 정상적인 수면을 취하게 됩니다.

따라서 생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각에, 일정시간 동안의, 적절한 구조의 수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잘 잔 것같이 느껴지더라도(혹은 옆에서 그렇게 보이더라도) 위의 세 조건이 만족되지 않았다면 제대로 잔 것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시험 준비를 하느라,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적절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인체의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며, 거창하게는 ‘자연의 섭리’에 역행하는 일입니다.